노블(noble),귀족

 

귀족(貴族, 영어nobility, aristocrat)이란 혈통이나 문벌에 의해 사회적 특권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일족, 또는 그 신분을 말한다. 곧 귀족이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 귀족정(aristocracy)이라 한다. 주로 가계에 따라 세습되지만, 특별한 공적에 의해 새로 귀족이 될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달라져 왔으나, 주로 귀족이 아닌 일반 민중보다 큰 부, 권력,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국가에 따라 귀족제의 형태는 상이하므로 그 범위와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황족(皇族)', '왕족(王族)', '공족(公族)' 등으로 불리는 군주의 일족, 곧 왕실(royalty)을 귀족보다도 높은 특별한 지위로써 보아 귀족에 포함하지 않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의 모토였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별한 권리는 곧 특별한 의무도 동반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귀족의 일상적 몸가짐부터 고귀해야 함은 물론 사회적으로 특수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동시에 이는 귀족이 평민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존재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현대의 유럽에서는 그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어 영국 등 일부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명예적인 직위로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귀족이 명예만 남았음에도 귀족의 후예들은 일반인에 비하면 실질적으로도 여전히 상당히 잘난 편[1][2]이다. 인도의 하류층도 많은 정신승리를 했으나 실제로는 실력도 밀리기 때문에 상위 카스트 사람들에게 미국에서까지 차별[3]을 받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평민들과 입장과 관점이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화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들의 방식으로 귀족들을 주로 동화시켰고 평민들에겐 큰 관심이 없었다. 중세 유럽이 그런 특징[4]으로 유명하며 유목민 귀족들[5]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유목 민족들을 딱히 동화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한나라까지는 일반적으로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6]으로 보인다. 고조선이나 베트남[7] 백성들 자체를 동화시키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귀족의 잔재가 많이 사라진 송나라, 명나라 같은 나라에서나 백성들의 동화에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귀족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민중들에 비하여 세력이 많이 밀렸고 민주화에 의해 귀족적 특성이 사라지게 된다. 평민파 귀족인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들의 혈연 부족을 해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도 귀족이란 것은 민중에 비해 상당히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민중들이 중우정치를 자주 행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역시 귀족보다 민중을 경멸하여 민중보다 귀족들의 사상과 문화, 사회를 모방하거나 도입하기도 했다.

귀족들은 세계적으로 가능하면 믿을 수 없는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들로부터 안전과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고 그것이 실제로 옳은 판단[8]이었을 수도 있다. 서양에서는 주민들이 사는 곳과 성이 떨어진 모트 앤드 베일리(Motte and Bailey) 같은 형식이 유행했으며 일본 역시 하기성과는 별도로 산에 독립된 산성을 설치하고 추가로 혼마루와 니노마루를 건축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설사 내부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고 반격을 통하여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다.

민중사학 등의 관점[9]에서는 이런 국가들이 매우 비판을 받았으나 순수 민중들에게 맡겨진 국가들보다 차라리 귀족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이 더 우세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동의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등의 귀족들 역시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등의 민중들을 실질적으로 능가하고 있으며 동남아에서도 태국이 역사적으로 비슷한 라이벌이었던 베트남, 미얀마 등에 비해 아직까지도 1인당 gdp 등이 더 뛰어나다. 인도에서도 인도식 자본가 계층인 바니야 정도가 아니면 인도의 상위 카스트 사람들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편[10]이다.

독일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던 초기의 알렉산드르 두긴적 사상이 실패한 이유도 민중과 다른 귀족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귀족의 특수성 혹은 게르만 귀족의 정체성 때문에 과학기술자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의 충성과 헌신을 받는 게 쉬웠으나 현대의 러시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귀족제(貴族制, peerage)는 귀족의 세습과 등작, 특권 등을 규정하는 제도이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귀족제의 양태는 제각각 다르다. 이런 나라는 주로 혈통과 혹은 문벌, 재산 등에 의해서 특권이 인정된 귀족정(貴族政, 영어: aristocracy)으로 통치하며 귀족 전원 혹은 대다수[11]가 참가하는 직접귀족정과 일부만이 참가하는 간접귀족정이 있다. 공통된 특징으로는 귀족들의 사적인 힘이 매우 강하다는 점[12]이 있다.

귀족제에서는 딱히 관직이 없는 귀족들조차 상당히 막강한 모습[13]을 볼 수 있으며 사산 왕조처럼 관료들[14]은 고작 평민 바로 위의 계급이기도 했다.

귀족제는 역사적으로 주로 민중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이것이 정말 형편없는 제도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인구 숫자도 훨씬 적은 귀족들이 질적으로는 민중 출신들을 압도하는 경우[15][16]를 많이 볼 수 있었으며 능력주의 등을 선언한 마이클 영 역시도 내심 귀족으로 편입되는 것을 원했다.

사실 민중들이 자신들끼리도 자연스럽게 신뢰하지 못 하는 이유[17]도 없지는 않다. 민중들이 스스로 미화하는 주장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면 그들은 오히려 상류층이 진짜로 법에 의해 보호받는 특권[18]을 가지고 있어도 숫자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딱히 분배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세력이 압도적[19]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이승만, 박정희[20], 전두환, 이명박[21] 등에 비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민중 출신들은 자연스럽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 양반들은 옛날부터 1위 수준이었던 로봇 밀도나 정부 지원[22] 등을 고려하면 타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는 오히려 민중들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른 시기부터 수출에 집중하여 내수로 성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힘들다. 따라서 양반들의 성취는 상대적으로 양반들에게 많이 돌아갔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양반들이 부유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수준 등을 고려해서 공정하게 비교하면 딱히 서민들을 착취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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